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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네하우스(2003- )/뮌네 하우스

3/18중국심양

by 道然 배슈맑 2009. 3. 19.

(심양) 

옛 이름은 봉천(奉天). 현재 요령성(遼寧省)의 성도이다. 중국 東北(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중국 제1의 공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다. 심양은 일찍이 전국시대부터 개발되었으며,

청조가 일어나면서 1625년에 이곳에 수도로 정하고 성경(盛京)이라고 칭하였다.

1644년 북경을 수도로 정한 뒤에도 이곳을 배도(倍都)로 삼고, 1657년에는 봉천부를 설치하였다.

1895년 이후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핵심적인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또 러일전쟁(1904~05) 중인 1905년 2월 19일에서 3월 10일 사이에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청조가 멸망한 뒤에는 심양은 장작림(張作霖) 정권의 본거지가 되었다.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봉천으로 개칭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심양으로 복귀하였다.

 

 (심양고궁)

청나라 태조와 2대 태종의 황궁이다.청태조 누루하치와 제2대 태종 황태극 때의 황궁으로 1625년에 짓기 시작하여

청나라 숭덕(崇德) 원년 (1636)에 완공되었다.

총 면적은 6만㎡로 90여 개의 건물에 300여 칸에 이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지은 지 35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내부는 동·중·서로로 크게 나뉘고 출구는 남쪽에 있다.

동로에는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大政殿)이 있는데,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중로에는 숭정전(崇政殿), 봉황루(鳳凰樓), 청령궁(淸寧宮) 등의 주요 궁전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대정전)

 

 

 

 

 

 

 

 

 

 

 

 (중로)

 

 

 

 

 

 

 

 

 

 (숭정전)

숭정전은 황제가 문무백관을 회견하거나 정무를 보던 장소로 청 태종 황태극이 바로 이곳에서 '대청(大淸)'이라는

국명을 선포했다.2층 팔각형이 특징이며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알현할 때, 봉황루는 연회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

 

 

 

 

 

 

 

 

 

 

 

 

 

 고궁의 한 귀퉁이에는 독서당이 있다. 이곳에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와 있었다고 한다.

 

 (봉황루)

 숭전전 뒤에 위치한 봉황루는 연회를 열거나 황제가 휴식하던 곳이었다.

성경(盛京) 시대에 봉황루는 성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루에 서면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성경팔경(盛京八景) 중의 하나인 '봉루효일(鳳樓曉日)'이 바로 이곳이다.

루 뒤에 있는 청녕, 관저, 린지, 함경, 용복오궁은 내궁으로 황제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심양고궁의 수수께끼

심양고궁은 원명이 성경궁궐이였고 후에 봉천행궁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으로 부터 380년전 청조의 창시자들은

이곳에서 중원에 진출하는 최후 한걸음을 내디뎠다.그중의 하나는 한왕(罕王)이 급급히 심양을 도읍으로 정한것은 강산의 용맥(龍脈)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1621년 누르하치는 8기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요동에 쳐들어갔고 도읍을 요양에 옴겨 대대적으로 집을 짓고

궁실을 건설했다. 그러나 의외로 1625년 3월 초 사흣날 아침 누르하치가 갑자기 많은 대신들을 모여놓고 의논하면서 오늘의 심양인 성경에로 도읍을 옮길것을 제기한것이다.

누루하치는 봉령산기슭에 천불사를 수건하고 세개의 절로 신용(神龍)을 누르는 것으로 왕성한 용맥을 유지하련다고

했다. 그러나 세개의 절은 용머리와 용발톱, 용꼬리만 누르고 성안의 용허리는 누르지 못했다.

따라서 용이 허리를 꿈틀거리기만 하면 훈하의 북쪽기슭에 계속 날아가게 되었다.

한왕은 용이 하늘의 뜻에 따라 용잠지지에 다시 못을 파라고 명령한 줄 알고 강 북쪽이슭에 못을 수건하도록 명하여

새 도읍이 일어서게 되였으며 따라서 이곳을 <봉천>이라고 명했다.

때문에 옛날 운하를 심수라고도 했고 강 북쪽 기슭이 양지여서 심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심양은 운하의 양지쪽에 있고 우로는 요하와 통하고 요하는 또 바다와 통하기때문에 <풍수가 좋은 곳>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또 누르하치가 심양에 도읍을 옮긴 더 중요한 목적은 전략적인 고려에서 였다.

우선 심양은 사통팔달한 곳에 있어 그 지리적 위치가 당시의 만족에게 있어 아주 유리했고 북쪽으로는 몽고를 치고

서쪽으로는 명조를, 남쪽으로는 조선을 칠수 있고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도읍 요양은 만족과 한족의 모순, 충돌이 날로 엄중해지고 있었지만 심양은 중등 도시여서 인구가 적어

관리하기 쉽고 만족과 한족간의 모순격화를 피할수 있었다

 

 

 

 

 

 (평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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