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시간) 02/25 22:00 신도림 출발
26 02:20 추풍령 도착
03:30 추풍령 출발
03:55 금산(384봉)
04:30 매봉재-502봉 2.65km
05:30 사기점고개
05:50 묘함산 갈림길 4.19km
06:30 작점고개 2.05km
07:00 무좌골산(474)
07:20 갈현고개
07:30 기도터바위 (아침식사)
08:10 식사후출발
09:00 687봉
09:10 용문산(710) 5.13km
09:30 용문산 기도원 갈림길
10:10 국수봉(790) 2.47km
10:25 683.5봉
11:30 큰재 3.18km
8 시간 19.67km
(기도바위)
(02/25 22:00)신도림 역 산행 출발지로 향하는 물푸레의 운전 핸들이 무거워 보인다. 지난 구간
이후 2주간, 두번의 상(喪)과 작은 놈의 졸업식 이후 주말의 피로가 겹친 탓인가..임관식을 위해
입소하는 신임 소위의 따블빽(duffel bag)을 실어 주려던 엄마의 바쁜 운전이, 아파트 입구에서
경미한 사고를 내어 교통계 조사반에서 조서를 꾸미던 시간에, 결국 낑낑대며 무거운 짐을 짊어
지고 훈련 입소한 막내에게 미안한 탓인가..10년 무사고에 오점을 남겨 좀 안됐기는 하지만,
그리 크게 사건으로 몰고 가지 않아도 될일을 ..세상이 각박해진 탓인가..보험으로 처리했으니
다행이다.
봄의 문턱에서 느끼는 밤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예봉산 토요산행을 즐긴 26산케 김대장의
목소리가 잠기는 것으로 보아 싸릿집 닭곰탕에 이슬이를 꽤 많이 동행했나 보다. 안성휴게소에서
야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오니 가늘은 봄비가 뺨에 와 닿는다. 이번 구간은 비교적 짧고, 난이도
도 쉬운 편이라 모처럼 배낭에 포도주도 한병 넣어 왔는데...부디 많은 비는 뿌리지 않기를...
지난 해 9월 부터 지금까지 비록 많은 적설지대를 통과하긴 했으나 비교적 날씨 조건은 좋았다.
부디 올 한 해 악천후를 잘 피해 다닐 수 있기를 빌어 본다.
(02/26 02:20)구간 출발점인 추풍령 표지석 앞에서 올려다 본 지난 구간의 눌이산 내림길이 어둠
속에서도 발이 저리도록 힘들게 느껴진다. 홀로 고생한 줄 알았더니만 젊고 건강한 대부분의 일
행들도 힘들었다니, 이 몸이야...앞으로 속리산 본 구간까지의 화령지구 구간에서 여유를 찾으며
몸 가꾸기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리라 다짐한다. 어차피 다소 힘들게 잡은 계획에서, 뭔가 나아진
보람의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선 항상 긴장하고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허리춤에 차고 모처럼의 부드러운 봄비에 젖어 보기로 한다.
(봄비에 젖은 솔잎)
(03:30)모처럼의 포근한 기온을 한 껏 반겨 마시며 준비운동을 끝낸 대원들의 첫 발걸음이, 추운
겨우내 눈속에 묻혀 있던 비포장 진입 도로의 젖은 진흙 길에서 랜턴 불빛에 놀라 잠 깬 당마루
멍멍이들의 끈질긴 짖음과 함께 주춤거려 진다. 마루고개를 도망치듯 올라선 헤드랜턴의 행렬은
끊김없이 길게 장관을 이루고 남쪽 광천리(김천시) 불빛들을 벗삼으며 금산 정상까지 동쪽으로
단숨에 올라선다.
어둠 속에서도 금산 북사면을 온통 후벼 낸 채석장의 검은 공동(空洞)이 공포스레 비쳐진다.
150여 미터를 깕아 먹었으니 남은 남쪽 자락의 밟히는 암반들이 사라질 날이....
가까스로 마루금을 지탱하는 대간길이 안스럽다. 위험스런 산정(山頂)을 피해 동쪽 매봉재로
내려서는 암반 길이 봄비에 젖어 다소 미끄럽지만 그리 길지 않은 내리막을 지나 502봉까지의
1시간여 워밍업은 선두와 후미가 전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다.
추풍령 저수지와 작점리 마을을 끼고 도는 화령지구 대간길은 이후 난함산 갈림길까지 완전히
동진(東進)하며 평탄한 육산의 트래킹을 즐기게 한다. 2000리 대간길에 이리 부드러운 걸음이
또 있을겐가.. 촉촉한 이른 봄비가 땀마저 식혀주니 산행 날씨엔 백점이다. 이런 정도면 물푸레가
좋아하는 우아한(?) 등산길로 완벽한 조건이겠지..밟아가는 폭신한 솔잎이 향긋한 솔내음을
풍기며 먼지 한점없이 동네어귀를 돌아지나는 대간꾼들을 반겨 맞는다..더도 덜도말고 이런
정도로만 걸을 수 있다면...동쪽 하늘이 구름 걷히며 별마저 보일듯하다.
(05:30)502봉을 지나 1시간여의 평온한 트래킹을 즐긴뒤 비포장의 좁은 농로가 시작되는 사기점
고개에 다다라 2시간만에 휴식을 취하며 목을 추긴다. 동쪽 난함산(卵含山) 하늘에 별들이 제법
눈에 띌 정도로 새벽이 맑아지며 부슬거리며 감싸던 안개비도 걷혔다. 지난 구간에서 묘함산(卯
含山)으로 지도상에 표시했던 산이 사실은 난함산의 誤記로 비롯되어 서로 혼용된다는 설명이다.
작점리와 능치리 마을을 알을 품듯 길게 늘어진 모습이니 난함산이 그럴듯 하다.
난함산 갈림길에 다다라 포장도로를 따라 길게 건너뛰는 대간 마루금에서 등산화 밑바닥을 뚫고
전해오는 시멘트 경음에 마음마저 시리다.백두대간 보호법을 만드는 법석 중에서도 대간 발길 막
아 돋아나는 풀섶 색깔에만 신경 쓸게 아니라, 대중들의 눈길 뜸한 곳곳에는 생각없이 밀어 올리
는 편한 포장도로가 대간의 맥을 거침없이 끊어 놓을텐데, 이처럼...아파오는 내 땅이여....
(갈현고개-난함산 일출)
(06:00)작점고개로 내려서는 길의 긴 포장도로를 왼쪽으로 크게 휘감아 북쪽으로 향하며, 오른쪽
신애원 농장과 정신병원의 큰 건물들에서 밝히는 환한 신음들이 난함산 마루턱을 향해 소리쳐
오른다. 이 땅 곳곳의 도회에서 지치고 병든 영혼들이 이 작은 골짜기 마을을 이루며 모여 들어서
어떤 영험한 손이 있어 그의 기도로, 그가 건네주는 한 알의 약으로 훌훌 맑아질 수만 있다면...
축사에서 긁어 뱉어 놓은 배설물의 독취만이 진실하게 느껴진다...
산같은 산도 아니요 넓은 들녘도 아닌(非山非野), 작점리 한마을을 돌아 내리는 대간 마루금에서
평온한 트래킹을 즐기는가 하면, 지친 영혼들의 음울함 마저 동행하는 새벽의 신흥 마을 뒷산을
타고 넘으니 잘 포장된 장동재(작점고개) 고갯길(김천 어모면- 영동 추풍령)에 내려선다.(06:30)
어모면 쪽에 능취쉼터로 잘 꾸며진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왼쪽언덕을 올라서서 20여분
가벼운 오르막을 밟으니 무좌골산(474)에 다다른다.(07:00)
동쪽 난함산 끝머리 옥계마을이 동을 틔우며 곧 흐리고 변덕스런 날씨 가운데서도 맑은 일출을
잠시나마 예고한다. 포근한 갈잎 낙엽들을 밟으며 ,30여분 만에 갈현 고개를 후딱 지나 기도터
바위 움막 부근에서 자릴 잡고 아침식사를 때운다. 오랜만에 손이 시리지도 않은 식사다운(?)
야외 식사를 느긋하게 즐긴다.
(낙엽-용문산 오름길)
(08:10)모처럼 여유로운 식사를 즐긴뒤 오늘의 구간 중에서 제법 산다운 높이의 용문산(710)을
향해 오름길을 밟아본다. 온통 낙엽으로 뒤덮힌 호젓한 남사면에서 촉촉히 묻어나는 봄기운을
느끼지만, 점점 짙어지는 안개와 바람이 제법 쌀쌀함을 안겨주며 아직은 겨울의 시샘이 만만치
않다. 헤집어지는 낙엽 아래서 파릇한 새순들이 가늘은 기지개를 편다.
잠시후 온통 산허리를 감싸는 짙은 구름이 북서풍을 타고 밀려와 앞을 가린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름길에서 1시간 남짓 천천히 산행을 즐기며 사진을 남기려 하나 안개 속에서 포기한다.
타쉬겐트로 향하던 길에 아무르띠무르 박물관이 있는 공원 근처에서 차를 내려,
그다지 바쁠 일 없는 우즈벡의 둘째 날 저녁을 한가로이 보내기로 하고 K노인을
모시고 노천 까페 풍의 파라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칭기스칸 이후 사마르칸트
지역에 주둔하며 문화 발전을 이루었던 아무르띠무르의 이름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며 사진 찍기를 권하는 사진사 덕분에 K노인과 함께
얼굴을 남기는 유일한 문서를 작성했으나, 그나마 1장 받은 그 사진을 그분께
드렸으니..
“자유롭고 자주적인 내 나라 내 정부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이 새 나라의 기본이
될 틀을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는 일...에 아나키스트라고해서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좌와 우가 평행선을 달리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있...“는 상황에서
단주 유림 선생이 택한 1946년의 독립노동당 결성은 훗날 1962년 군사 정권에
의해 문을 닫을 때 까지 이 땅의 중도 민족주의자들의 중심으로 자릴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겪은 후의 정치 양상은 매우 달라져 공산치하에서 수많은 당원들이
피살되고 납치되어 대구를 거점으로 경북지역의 젊은 의지들로만 규합하여 다시
서울로 진입하기까지는 2-3년이 더 걸렸고, 현실 정치에 외면하며 선거부정의 감시
에만 주력하며, 60년 혁명선거에 까지 입후보를 내지 않았다.
끊임없는 이승만 독재정권과의 싸움에서 단주 류림의 50년대 후반은 환갑을 넘긴
나이를 잊을 정도로 단호하고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고독한 정치역정이었다.
모든 자유는 쪼개어 질 수 없는 사회성을 가지긴 하나, 전체의 자유를 위한 계급적인
희생을 인정할 수도 없었기에 공산 사회주의와도 북만주에서부터 먼저 결별하고,
해방 후 이 땅의 서툰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개인적인 자유의 개념으로 저지르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독재와 부닥쳐 나가는 단주 선생의 삶의 끝자락은 K노인이
지켜보기에는 처절하리만큼 고독한 행보였다.
단지 신념자체의 힘과 진리를 믿는 선생의 정신적인 힘에 대한 타당성을 느끼며,
K노인은 전쟁 중에 자신에게 밀려온 어처구니없는 권력에 의한 자유 침해의 현실과
싸워 나갈 작은 역량들을 가꾸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자유주의자들처럼 이상에
따라 반성적으로 선택한 결과로만 그러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관행과 사회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선을 위하여 희생하는 공동체
주의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용문산 정상이 바로 보이는 턱아래 687봉을 올라선 후 오른쪽으로 10여분 짧은 암반길을 오르니
헬기장으로 잘 꾸며진 용문산 정상에 올라선다. 작은 정상석 하나 없는 것이 마주보이는 국수봉
에 정상을 넘겨준 탓인가..잠시 휴식을 취하며 기념 촬영을 마친후 국수봉을 향한 작은 급경사를
밟아 내리니 북사면의 잔설과 낙엽에 가려진 빙판길이 매우 조심스럽다.
(용문산 정상)
(09:10)용문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돌아 내린 후 다시금 30여분의 편한 트래킹을 즐기며 오른쪽
용문산 기도원 마을의 거대함에 놀라움을 느낀다. 점점 사라지는 시골 초등학교와는 반대로 넓은
운동장 같은 체육시설 마저 갖추며, 완전히 집단 훈련장으로 변모하는 기도원 마을이 동쪽 산자
락을 온통 시설물로 가득 채운 느낌이다.
인간의 갈구가 빚어내는 종교라는 이름의 도덕률 속에서 우린 또 다른 무의식의 죄를 빚고 있지
는 않는가..그들의 눈에 비친 일요 무박 대간꾼들은 과연 구제 받지 못할 긍휼한 죄인들인가..
과연 종교라는 이름으로 ,믿음이라는 가정으로 행해지는 가증스런 도덕들로 무장한 채,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저승을 갈구케 하고 , 이 땅의 영혼들을 연민의 정으로 동정하는 그 비겁함은 언제까
지 어디까지 이 땅에서 영속될 것인가..
내가 믿는 그 큰 힘과 그들이 믿는 절대자와는 과연 다른 존재인가..예수와 절대자는..종교집단의
소위 성직자들에 의해 예수의 삶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을까...., 스스로 실천의 가르침을 살다 간
그분을 사흘만에 다시 꺼내고 최후의 심판을 들먹이며 인간과의 거리를 더욱 더 멀게 하는 집단
들의 바램은 무엇일까...
내 발길이 나아가며 부닥치고, 온몸으로 느끼는 이 산하의 정령들과 귀신들의 영혼은 과연 그들
이 유일하게 받드는 절대자 그 한 분과는 공생하며 춤출 수 없을까...결코 누구를 지배하는 영혼
이 아니라 함께 영생하며 자유로이 의지를 실현하는 이 대지의 영혼들이기에...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 안개 속에서 소로를 지나 국수봉 오름길을 마주할때 까지도 흐리게 엄습하
는 어두운 대지의 기운을 느끼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용문산 북사면)
(10:10)국수봉 직전 안부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일행들이 건네주는 과일 한 조각이 꿀맛이다.
점점 무르익어가는 대간 길의 정들이 함께 뭉쳐 올 한 해 긴 무더위를 지나고 나면 어느 맑은
가을 날 진부령 기슭에서 작은 소망을 찾음에 기뻐하며 동해안 바닷가에서 회포를 풀 수 있겠지.
화려한 풍광도 아닌 이길을 대간이라는 이름을 좇아 뚜벅거리는 우리들의 가슴엔 산행의 즐거움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감동을 이어가야 할 대지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온통 잎 떨군 채 한 겨울을 눈과 추위 속에서 지냈을 낮은 산의 관목 숲을 올라서니 이 구간 유일
의 자그마한 정상석이 백두대간 국수봉이라 적고 있다. 낯설은 손 수(手)변의 한자가 이채롭다.
아마도 물 수(水)자로 보아 낙동과 금강의 분수령을 뜻하는 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안개 속에서나마 기념 디카 한 컷을 남기고 북사면 마지막 급경사 내림길을 의식하며 이 구간
처음으로 아이젠을 꺼내 착용한다.
10여분의 급경사 짧은 내림길을 내려와 마지막 오름의 683.5봉 안부에 올라서니 짤려 넘어진 몇
그루 나무들의 잔해가 을씨년스럽다. 잡목 벌채의 좋은 뜻으로 이해는 가지만 예쁜 소나무라도
한 그루 있었으면... 작은 소로길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우하리 큰 재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펼쳐진 다음 구간을 조망한다.
세 살배기 어린 사내아이를 엄마처럼 허리에 둘러 맨 채 정릉 산마루 놀이터를
뛰어다닐 정도로 서울 생활에 익숙해진 큰 딸 아이의 밝은 모습을 지켜보며
K노인은 작은 행복의 꿈도 그리웠으나, 어려워지는 살림살이는 아내의 말없는
공장 생활에서 받는 적은 돈으로 주로 꾸려나가고, 그 자신은 매일 매일을 류림
선생의 뜻을 받드는 젊은 대학생들을 찾아다니며 그 조직의 재건에 매달렸다.
그러던 1957년 봄, K노인은 또 하나의 운명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 심문을
받게되었다. 한 해전부터 시작된 통일 민족 운동의 대학 내 집회가 무르익어 갈
즈음 새 학기의 개강과 더불어 서울 지역 대학생 연합회를 구성하기 위해 뛰어
다니던 중 류림 선생의 정적들에 의한 무고 고발장이 접수되어 그 측근으로서
먼저 수사를 받게 되었다. 공산 세력들과의 연계를 밝혀 내려는 세력들과의
끊임없는 논쟁과 질 수 없는 항변 속에서 점점 확고해져 가는 K노인의 자유사상은
아나키스트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실제로 “소련 사대주의”에 빠진 공산 독재론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며,어떠한
계급적 독재와도 맞서 싸울 수 있는 민족적인 자유주의자로서 유림의 뜻을 받아
들이며, 결코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경도 될 수 없는 신념으로서, 계약적인
자유 사회의 논리에서 벗어나 참된 민족 전체의 자유정신의 실현을 위하여 평생을
노력하겠다고 다짐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다가오는 의문 속에서, 현실정치에의 외면과 국가체제와의 마찰에
따른 비생산적인 이념 논쟁의 한계가 대학 내 지식층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에
대하여 K노인으로서는 류림 선생의 임정참여로 그 해결을 찾으려 했으나, 선생은
시대가 바뀐 상황을 설명하며, 일본제국주의에의 대항으로서 임정을 인정하는 것
일 뿐,강권적 국가체제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천지개벽처럼 만인의
자유로운 세상을 위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다.
1시간여의 지루한 내림길이지만, 산행시간이 8시간 정도이고 그리 험한 오르내림을 겪지 않아
아주 편안한 발걸음으로 하산지점에 내려선다.
(국수봉 내림길에서 바라본 큰재,우하리,백학산)
(11:30)가벼운 발걸음으로 산행버스가 기다리는 큰재(320) 신곡리 날머리에서 진흙에 더럽혀진
신발을 씻으려 하나 겨울 가뭄에 말라 붙은 고랑들이 물 구경을 거부한다. 겨우 논가에 고인 손바
닥물에 흙을 씻는다. 넓게 펼쳐진 속리산까지의 화령지구 非山非野의 대간길이 무척 맘에 든다..
체력적으로...
폐교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의 교문은 굳게 닫힌 채 백두대간 훈련장으로 꾸밀 계획은 아직
실행이 어려운듯, 잡풀만이 무성한 운동장 뒤로 멋대로 자란 향나무 그늘 속에서 내 유년의 어린
모습을 찾는다. 힘겨운 돌멩이 의자들에 둘러 앉아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다 신작로를 따라
시멘트 블록을 실은 추럭이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면, 어린 고사리 손들로 블록 한개를 마주
잡고 낑낑대며 손수 시멘트 삽으로 교실을 짓고 있는 선생님들께 옮겨준다...
60년대 초반, 전후의 시골 초등학교에선 한 칸씩 늘려가는 교실에 하얀 횟가루 칠을 하는 날이
동네 잔칫날이었는데...작은 시설물이라도 기념물로 잘 가꾼다면 이 곳을 지나간 많은 벗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추억을 되살릴 수 있을텐데..
920번 지방도(모동면-공성면)를 따라 길가에 앉은 채 봄날의 이슬이를 즐긴다...
2/28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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