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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정맥(2007-10)·完了/금남정맥(08)·完了

3/2함박봉(물한이재-양정고개)구간종주-금남정맥5차

by 道然 배슈맑 2008. 2. 27.

 

 

(산행 시간표)

3/2 06:40    서울대역   출발

     09;50    물한이재   출발

     10:06    363.9봉

     10:50    곰치재                              3.2km

     11;40    덕목재                              1.5km

     12:25    깃대봉                              1.2km

     13:00    깃대봉 점심식사 후 출발

     13:40    함박봉                              2.0km

     14:00    황룡재

     14:35    대목재                              1.8km

     15:35    천호봉                              2.0km

     16:15    304.8봉                              1.3km

     17:15    천마산                               2.2km

     18:00    양정고개                            2.8km

     18:20    엄사초교                            1.5km

                 8시간 30분                  19.5km

             

(황령재에 있는 황산벌 전투 개념도)  

(3/2 05;30) 서울대역으로 향하는 산행 길 발걸음이 지난 주를 건너 뛴 탓인지 왠지 뻐근하기도 하고 뭔가 가볍지를 못한 기분이다. 오랜

만에 두 아들들이 집안을 가득채우는 일요일 새벽에 서둘러 배낭을 챙겨 물푸레의 도움으로 전철역으로 도망치듯 빠져 나오니 전철 속의

젊다 못해 어린 청소년들이 버릇없는 행동으로 눈쌀을 찌뿌리게 한다. 결국 어느 노인 양반의 화난 노여움이 상스럽게 꾸짖으니 교육이고

야단이고 아무런 효과없는 반항과 한탄만 남길 뿐이다.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하는 수 없이 끼어들어 아이들을 꾸짖었으나..맘이 개운

치 않다. 어린 청소년들의 새벽은 어차피 방황의 연장인데..좀 더 느긋하고 젊잔케 타일렀으면..결국 우리 어른들의 책임으로 나타난 오늘

이다..그들을 꾸짖기 위한 우리 어른들의 용어와 맘가짐이 사랑의 표정으로 먼저 나타나야 할것이다..참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09:30)휴일의 고속도로를 달려 논산벌 연산면을 지나 덕곡리 물한이재 공사판 고갯길을 걸어 오른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은 고

갯길이 휑하니 뚫린 채 다시 터널공사를 한다고는 하나..바삐 예산을 투입해서 연결할 기미는 안보이는게 당연하다..아직 양쪽 배후 마을

의 진입로도 이어지지 않은 엉터리 계획이니까..여러가지로 심사가 맑지 못한 산행길의 아침이지만 계룡산으로 향하는 황산벌의 시간 속

으로 내 기억들을 잠수시킬 수만 있다면..비나 눈이 내린다는 예보에 배낭은 꽤 무겁지만 차라리 황사보다야 낫겠지 생각한다. 

 

 (363.9봉에서 내려다 본 반암리..남쪽 완주,전주의 산그리메가..)

(09:50) 모처럼 13명의 많은 인원으로 출발하는 물한이재 서쪽 절개지 들머리가 잠시 된오름을 맛보여 준다. 10여분간의 첫 오름은 지난

번 구간 날머리에서 절개지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건넜던 마른 계곡 능선에서 이어지는 주능선을 향해 급경사 사면을 거친다. 잠시 후 삼각

점이 있는 363.9봉에서 지나온 대둔산과 남쪽 전주 쪽을 조망하니 아직은 하늘이 맑고 예상외로 비를 만날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다. 이후

로 이어지는 작은 봉우리들을 너댓번 오르내리며 왼쪽 발 아래 반암리 계곡을 내려다 보며 한가롭고 평화로운 농촌의 삶을 그리워 한다.

 

 (곰치재로 넘어가는 암봉 오르막의 칼날능선에서..)

(10:30)바위로 이루어진 칼날능선을 만나면서 훤히 트인 조망에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월성봉 능선을 또 한번 뒤돌아 본다.조심스레 암릉

을 길게 디뎌 오르니 암봉왼쪽 사면을 넘는다. 잠시 후 326봉 삼거리에서 오른쪽 곰치재로 방향을 바꾸고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니

웅치산성터 무너진 돌들이 너덜을 이룬다. 각진 돌들에서 1500년전 이 땅의 갈라진 다툼의 역사가 배어난다. 분명 같은 민족임에도 그들

은 같은 언어로 욕을 하며 싸움을 벌였으니, 본시 인간사회의 권력이 만들어 낸 경계영역 금긋기란 이 땅 저 땅 할것 없이 그들의 속성으

로 남아 오늘에 이른 것일까..아무튼 오늘의 이 산길에 서서 삼국이 통일되어 한반도의 단일국가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훗날

인류사회의 통합을 꿈꾸는 이 기원이 글로벌 운운하는 우리네 현실의 진정한 인간 정신이길..그리고 그 길은 자유인의 길이기를..

 (지나온 능선길 너머 대둔산, 월성봉이 잘가라고...)

(10:50)웅치산성 터 내리막길을 왼쪽으로 내려선 후 편한 능선을 지나 오른쪽 곰치재 황토길 임도에 내려선다. 단순한 임도가 아니라 제

법 큰차들도 다니는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전측의 송전탑 설치공사를 위해 온통 산길을 파헤치고 있다. 이 정도면 헬기로 공사하

는 것이 자연 환경이나 경제적으로 훨씬 나을 것 같기도 한데..또 다른 이유야 있겠지만..우선이 뭔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곳곳에 망가

지는 정맥 길에서 이 땅의 역사적인 지맥의 의미를 더 많은 발품과 연구를 통하여 다시 복원되는 날이 오기를 바래보지만..이렇게 선답자

들의 아픈 추억으로만 떠돌까 걱정스럽다. 동행하는 임도를 버리고 왼쪽 숲길로 올라서서 300여m 남짓한 낮은 서너개 봉우리들을 30여분

편한 걸음으로 오르내린다.

 (덕목재 뒷목마을)

 (11:40)덕목재 큰 도로들을 지나는 차량 소음이 가깝게 들리며 꽤 높아 보이는 마지막 봉우리를 된오름으로 올라 정상 왼쪽으로 급하게

내려서니 인삼밭과 송전탑을 지나 호남고속도로와 국도가 함께 지나는 덕목재 절개지 위에서 잠시 망설인다..저걸 뛰어 넘어 말아..차량

들이 유난히 많아 보이고 굉음이 가져다 주는 속도감에 짓눌린채 오른쪽 대전방향에 있는 지하통로를 찾아 10여분을 우회한다. 하수구멍

으로 설치된 지하통로를 조심스레 물길을 피해 건너는 심정이 쓸쓸하다..설계 당시에 적어도 정맥길에 가까운 곳에 인간의 발길이 지날

수 있는 역사적인 인간의 길을 왜 고려치 못했을까..이 길은 맥길을 걷는 산꾼들만의 길이 아니라 수천년 이어 온 사람의 발자취인데..

 

 (깃대봉 오름길의 불탄 상처들..)

(11:45)덕목재 서쪽 뒷목 마을의 평화로움을 담으며 무량사 입구까지 국도를 걸어서 다시 절개지 서쪽 마루금을 잇기 위해 통신시설 기지

국 포장도로를 거쳐 왼쪽 숲 속을 더듬어 오른다. 군사용 참호를 지나 절개지 상단은 쇠그물로 덮힌 채 붕괴를 방지하고 있으나 매우 위험

해 보이는 안전시설이다. 오른쪽 능선길에 붙어 깃대봉 능선을 가늠하니 능선 길은 노인병원 공사터로 변한지 오래되어 참혹한 변형을 이

룬다. 도대체 건축 허가 관청이나 시설물 건축주에게 정맥길의 개념이라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내 분명히 단언컨데..맥길을 바로 곧게

베고 누운 무덤들 치고 잘 관리된 경우가 드물고, 제대로 후손의 돌봄을 맛보지 못한 채 사람의 길을 훼손한 고달픔을 면치 못했음을 경험

삼아, 맥길 가운데를 훼손하고 차지한 건물이나 사업체는 머지않은 훗날 그 더센 기맥의 魂氣를 감당치 못하여 불운한 결과를 맛보리라..

 

 (산직리 산성터..)

(12:00)공사터를 건너 수레길 오른쪽 능선을 찾아 오르니 또 다시 거치는 산불의 잔해마저 산길을 걷는 발을 아프게한다. 흔적으로 보아 1

년도 채 안된 것 같다. 이 능선이 다시 멋진 소나무들의 푸르름을 덮을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야 할까..작은 구릉같은 봉우

리들을 잠시 오르내리니 무너진 산직리성터를 너덜로 오른다.1500년의 역사가 이리도 잘게 부서져 포말 처럼 산기슭에 뿌려지는구나..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이 성터에서 산화했을까..이것이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아픈 상처이리라..

단재 신채호님의 역사에 대한 정의가 떠오른다.."我와 非我의 투쟁"이라..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패자의 슬프고 긴 이야기는 이렇게 산

산히 부서져 훗날 허공으로 떠돌 수 밖에..하물며우리 스스로가 짓밟고 파괴하는 우리 스스로의 맥길의 역사는 언제 어드메에서 기억되고

복원될 것인가..아픈 발길이 가슴까지 전해온다.

 (깃대봉에서..)

(12:25)성터를 지나 급경사 오르막 길에서 깃대봉을 우회하는 오른쪽 사면길이 유혹을 한다. 이제 본격적인 황산벌 북상길의 출발점인 깃

대봉의 삼각점을 외면할 수 없어 왼쪽 된오름으로 정상에 올라선다. 참호를 만든 넓은 공터에서 바라보는 남서쪽 탑정호(논산저수지)가

마치 서해 바다가 밀려 들어온듯하다. 아쉽게도 점점 짙어지는 황사 운무에 맑은 정경을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문득 계백의 혼이 흐린

하늘로 날아 오른다.. 비록 적국의 소년 화랑이지만 어린 관창의 용맹이 가상스러워 가슴에 껴 안은 채,같은 느낌의 제 자식, 제 아내를 목

베고 나온 전장터의 하늘을..뒤 따르던 까마귀 한마리가 황사 먼지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깃대봉에서 나아갈 북쪽 능선길을 바라보니..) 

(13:00)깃대봉에서 오른쪽 북상길로 내려와 안부 오른쪽 무덤가에서 30여분간 맛난 점심을 즐기고 한잔 장수 막걸리까지 겸하니 모처럼

편안한 걸음의 정맥길이 늦어질까 걱정된다. 졸음마저 밀려 들법한 오후를 서둘러 재촉하여 함박봉을 향한다.편안한 능선길을 걸으며 봉

우리 좌우측 사면길을 번갈으며 20여분 걸으니 송전탑을 거쳐 임도에 내려선다.(13:25) 컨테이너 박스까지 설치해 놓고 온통 산마루금을

따라 편한 차도를 만들어 오르고 있으니 아무래도 한전 철탑 공사용 도로임에 틀림이 없다. 오른쪽 임도를 애써 외면하고 함박봉 정상까

지 로프를 잡아가며 올라서니 활공장을 이룬 정상엔 감시초소와 활공중 사망한 벗을 기리는 비석만 외롭다. 왼쪽 황산벌을 조망하며 1000

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우스개로 만든 영화 장면들이 자꾸만 튀어나와 가벼운 걸음이 안스럽다. (13:40)

 

 (함박봉에서 내려다 본 연산면 황산벌)

동행하던 공사용 임도와 헤어지고 왼쪽 황령재(황룡재) 급경사 내림길을 중간 중간 통나무로 엮어 놓은 계단을 밟으며, 조심스레 북사면

잔설의 미끄럼을 지친다. 황령재(연산면/벌곡면;20번 지방도)의 절개지 마루금은 꽤 넓은 공동묘지와 교회 기도원이 한가운데를 차지하

고 뻔뻔스런 자태로 철망을 치고, 정맥 산길을 왼쪽 연산면쪽 주차장으로 억지로 인도한다. 예수님의 뜻과 다른 求福의 기도빨이 잘 먹혀

질까..커다란 공터를 이룬 황령재 주차장에서 황산벌 전투의 전적지 안내도를 보며 잠시 역사를 더듬는다.(14:00)  오늘 걸어가는 이 정맥

길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룬 모양이다. 아무튼 非山非野의 이 능선길에서 우리는 지나온 이 땅의 역사를 더듬고 수천년의 발길이 또

다시 이어져 평화롭고 편안한 자유를 위한 걸음이 되기를 빌어본다.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적막하다..)

황령재 국도를 따라 오른쪽 한삼천리 방향으로 이동하여 절개지 북쪽 천호산 등산로 표지를 찾아 마루금을 이어가며 호젓한 소나무 숲길

을 오르며 천호산을 향한다. 이렇게 고요한 숲길을 선화공주를 등에 업은 맛동(薯童,백제 무왕)이 걸어가고..300년 후 견훤의 아들 신검

도 걸어가고..뒤이은 고려 태조 왕건이 황산을 일컬어 天護山이라 이름짓고 개국을 기념하여 開泰寺 절을 지으니, 비록 산세야 나즈막한

동네 뒷산이지만 그 역사적인 의미는 그리 작지 않게 보인다. 하물며 고려 조선을 거쳐 1000년 뒤 전주 땅의 키 작은 장군이 계룡산 넘어

우금치에서 패퇴하고 돌아 올적에 대둔산 험한 산세를 기억하며 마지막 항쟁을 위한  쇠스랑을 끌며 한많은 걸음을 걸어 오고 있구나.. 

 

작은 봉우리를 두어개 올라선 후 농공단지 갈림길 돌탑 봉우리에 올라서니 산책을 겸해 올라와 쉬고 있던 동네 주민이 인삼캔디 한개를

건네주며 안스럽게 쳐다본다. 잠시 다리쉼을 한 뒤 오른쪽 개태사 방향으로 급경사 내리막을 미끄러지듯 내려서니 대목재 고갯길을 지난

다. (14:40)다시금 따라 오르는 오른쪽 공사용 임도가 벌겋게 땅을 파헤치니 애써 외면하며 하늘을 향하나 굵은 송전선으로 약 올린다.

마주하는 다소 높은 봉우리를 향해 헉헉거리며 기어 오르지만 황사를 피하고자 덮어 쓴 마스크가 답답하기만 하다.

 

 (황사의 위력이 해를 낮달로...)

(15:00) 북쪽으로 나아 갈 능선이 확트이며 황사가 아니면 계룡산을 마주하며 꽤 전망이 좋을 법한 전망봉(355봉)에 올라서서 잠시 휴식

을 취한다. 천호봉이 두어개의 작은 봉우리 너머에서 제법 멀게 느껴진다.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산행을 마치려면 마지막 구간을 좀 더

서둘러야 겠는데..지난 구간의 백령재 이후로 약간의 염증 증세를 보이는 왼쪽 발꿈치 인대가 신경이 쓰인다. 미리 준비한 약을 바르고 반

대편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며, 무사히 내림길을 마무리 짓기 위해 보폭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오히려 속도를 조금 늦추기 시작한다.

소나무 숲길이 그런대로 아기자기한 봉우리들을 30 여분간 지루할 정도로 대여섯개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오른쪽 사면길을 걷기도 하며

이어나가니 천호봉 정상이 나즈막한 고갯길을 이룬다.(15:35)  정상 아래 설치된 벤치에 앉아 5분여 휴식을 취한다.

 

 

 (천마산 정상)

 

천마산을 향하는 내리막을 지나면서 계속 이어지는 안내 표지판이 참 고맙기도 하지만 왠지 너무 많은 느낌도 들고 간혹 천마산까지의 거

리가 뒤바뀐 곳도 있다. 조금씩 고도를 낮추던 봉우리들이 농소리 갈림길을 지나면서 잠시 오름길을 밟아 삼각점이 있는 304.8봉을 지난

다.(16;15) 정상 아래 벤치에서 다시 쉬면서 답답한 무� 보호대를 풀고 천마산을 향하니 꽤 멀게 느껴진다. 북쪽으로 길게 늘어진 편안한

능선길을 두세번 오르내리니 송전탑을 지나 왼쪽 개태사로 향하는 임도에 내려선다. 오른쪽 천마산 방향의 공터에는 농업용 막사와 지저

분한 자재들로 눈쌀을 찌푸린다. 질퍽이는 황토 길을 지나 북쪽 능선에 올라보니 옛날 개태사 절터라고 여겨질 만한 풍광은 사라지고 파

헤쳐진 농로와 공사용 임도들이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정맥길을 아프게 휘감아 오른다.(16:50) 

 

 (천마산 팔각정)

공터를 지나 오른 천마산 방향 능선길 안내판이 짧은 오르막 이후에 두어번의 작은 오르내림을 거치며 계룡시에 접어들었음을 알린다. 논

산시에서 분리된 신도안 지역이 어느새 계룡시로 성장할 만큼 대전의 인구가 유입되고 커다란 군사도시로 발전했다.농소리 내림길을 지

나고 임도를 거쳐 로프가 매어진 급경사 길을 오르니 벤치가 있는 봉우리가 두리봉인가 보다. 오른쪽 금암지구의 아파트를 내려다 보며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오르니 천마산 돌탑에 금남정맥 안내판이 계룡시 구간을 자랑한다. (17:15) 여전히 황사가 시야를 가린 북쪽 계룡산

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질 않고, 석양도 만들지 못하는 서쪽 태양도 산 아래로 많이 기울었다. 송전탑 이정표가 왠지 거추장스럽다.

 

 (팔각정 아래 금바위?)

천마산 내림길이 잠시 로프와 통나무 계단으로 설치되어 다행히 얼어붙은 잔설 내림에 미끄럼을 대비한다. 양정고개 아림판이 나타나며

좌우 마을의 하산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잠시 편하게 올라서니 천마정 팔각정이 암봉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갈길을 막았다. 참으로 멋

없는 시설물이 되고 말았다. 몇m 옆으로 설치하여 정자와 능선길은 분리하여야 될터인데..정자 한가운데를 밟고 지나가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걸음이 내림길 직전 멋진 금바위 유래를 읽으며 잠시 멈춘다. 아무래도 이 바위는 금바위가 아니라 암소바위나 송장바위 처럼 크다.

(17:30)  이어지는 내림길엔 체육시설도 설치되어 있고 시청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왼쪽 으로 진행하니 삼각점이 두개나 있는 248.3봉을

지난다. 잔설이 녹아 질퍽이는 급경사 내림길을 로프에 의지하며 힘겹게 내려서니 양정고개 1번 국도에 내려선다.(18:00) 

 (엄사지구 신도마을을 내려다 보며)

(18:20) 양정고개 국도를 건너 엄사초교까지는 이미 시내 한가운데로 들어서서 고가도로 아래 굴다리와 호남선 열차 선로위를 넘는 신도

과선교 다리를 지난다. 비사벌 아파트 이름이 꽤 의미있게 붙여진 것 같고, 엄사초교 앞은 신도시의 냄새가 물씬하다. 산마루 곳곳에 선전

처럼 세워진 안내판 아니라도 영원히 사라진 정맥의 마루금 위를 뛰노는 어린 아이들의 가슴 속에나마 이 길의 의미를 새겨 줄 표지석이

라도 세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길이 영원한 평화의 길이 되기를... 

 

봄 은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버리겠지.

 

3/4 道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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