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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정맥(2007-10)·完了/낙남정맥(08)·完了

10/3-4삼신봉(백무동-영신봉-돌고지재)구간 종주-낙남정맥(1)

by 道然 배슈맑 2008. 10. 1.

 

 

(10/3 백무동-영신봉-삼신봉-고운동재) 

 

 (10/4 고운동재-돌고지재)

 

 

 

(산행 시간표)

10/3 00:00     동서울 터미널    출발

       04:00     백무동  도착

       04:30     식사후 백무동    출발

       07:40     세석 3거리                             10.0km

       08:00     영신봉                                  

       08:30     세석산장                               1.8km

       09:30     식사후 출발

       10:05     음양수

       11:50     한벗샘 

       12:50     삼신봉(20분 휴식)                 7.5km

       13:45     외삼신봉                              1.0km

       15:00     1,064 전망바위

       15:49     묵계재                                 2.5km

       16:40     고운동재                              1.5km

               12시간                                   24.3km

10/4 07;20     고운동재     출발

       08:45     798 암봉

       09:22     790.4봉

       10:10     길마재 (20분 휴식)                     5.0km

       11:10     칠중대고지

       11:45     양이터재                                   3.7km

       12:40     식사 및 양이터마을 식수 보충 

       13:30     방화고지 삼거리  

       15:20     돌고지재                                   5.0km

                 8시간                                    13.7km

       16:20     진주 터미널

       20:00     진주  출발    

 

 (한신계곡 오름길)

(10/3 00:00) 개천절 00:00에 출발하는 지리산행이란 내게 어떤 형태의 감흥으로 시작하여 이 가을을 지나고

또 한 겨울을 지날 것인가..

 대간길 이후 여섯번째의 정맥길인 낙남길의 출발을 시작하며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1960년대의 서부경남지역을

회오리 치던 해방후 초기 민주주의의 혼돈을 기억해 내며 내 고향 땅 낙동강가에서 발 담그는 날까지 50년 아픈

설움들을 훌훌 털어가며, 마루금이 가르는 큰 강 큰 바다쪽으로 흘려 보낼 수 있기를...

무한히 질긴 운명의 민족사에서 20세기 후반을 엮어야 했던 내 인생의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질곡의 낙동강 끝자락을 왼쪽 어깨에 짊어진 채로, 저 무한한 남해 바다가 지켜주는 근본을 저울추로 삼아,

비록 훠이적 거리며 힘든 걸음으로 나아갈 낙남길의 시린 칼날 능선 마루금에서라도 자빠지질 않고

서서 걸어 갈 수 있기를..아니, 무디어진 칼날의 좌우가 허물어질 수 있기를.. 

 

 (한신폭포위 새벽)

(04:00)대진고속도로 함양I.C를 빠져 나온 심야버스가 인월에서 산케 친구들 4명을 내려주고 백무동으로 향한다.

본래 계획은 성삼재-세석산장 구간을 하룻동안 어프로치 구간으로 산케 벗들과 함께 걸어 갈 계획이었으나,

10/5 일기예보가 비를 예상하고 있어 일정을 10/3-4로 단축하기로 하여 낙남길의 첫 구간을 백무동에서 직접

오르기로 계획을 수정한다. 벗들과 함께 부드러운 주능선을 즐기지 못함이 아쉽다.

백무동 야영장 아래 식당에서 새벽 밥 한그릇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대부분 장터목 하동바위쪽으로 향하는 휴일 등산객들과 헤어져 오른쪽 한신계곡 길을 따라 인적 없는 넓다란 길을 걸어 30여분 만에 첫나들이 폭포(2Km) 닿는다.(05:00) 

지난 여름 아이들과 함께 형님을 모시고 천왕봉에서 내려 오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밤길에 쇠로 만든 다리들을 지나면서  첫나들이,가네폭포,오층폭포,한신폭포들을 차례로 스치고 나니 어느새 새벽이 

밝아 온다.(06:30) 유난히 배낭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면서 세석으로의 발길이 잦은 쉼을 맞으며 등로가 길어진다.

 

 (세석고원에서 바라본 남부능선)

(07:40) 1시간여의 너덜길을 밟아 오르며 홍수에 밀려 내리는 '한신'의 꽹과리 소리와 함께 안간힘을 쏟고,

잦은 쉼을 거치며 드디어 지리산 주능선 세석 3거리에 올라섰다.

이미 천지는 환히 밝아진 채로 산산 골골이 숱한 사연을 간직한 채로 반만년을 묵묵히 이어 온 큰산 주능선에

올라서서, 이제 그날의 아픈 기억들을 떠 올리며 먼 길 南道 580里(232km)의 長程을 시작하려 한다.

힘든 오름길이었지만 그 시작의 첫걸음을 神께 얼른 告하고자 배낭을 맨채로 쉬질 않고 동쪽 靈神峯으로 걸음을 옮긴다. 등뒤로 촛대봉을 넘어 비추는 천왕봉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고 마주하는 오른쪽 영신봉 고교한 암봉이

역사의 시간 속에서 엄숙한 자세로 흐트림 없이 남쪽 능선을 거느리고 선 채, 힘든 짐을 지고

오르는 산객을 내려다 보며 무릎 꿇게 만든다.(08:00)

 

 (촛대봉)

동쪽 천왕봉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의 첫 걸음이 서쪽 노고단을 지나고 진부령에 닿았던 그날 이후로,

어느 새 3년이 흘러 5정맥을 거쳐서 그 여섯번째 맥길을 따라 이렇게 다시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깔려 있는

서부 경남의 고향 땅을 향하게 되니 새삼 감개가 솟구친다.

천왕봉을 향해 무사 행로를 빌며 엎드려 절하고, 부디 내딛는 걸음 걸음 마다 헛되지 않는 내 삶의 족적으로 간직되고, 이 먼 길 어느 산등성이에서 만날 슬픈 영혼들과 함께 낙동강 구포 어귀에 닿아,남해 바다를 향하는 그 원혼들과

이별하며 편가름 없는 영생의 땅으로 배웅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영신봉에서반야봉을 뒤로하고)

(08:30)영신사 절터를 지나 음양수로 이어지는 낙남의 첫 걸음은 출입 제한으로 감시의 눈길이 심한 것 같아 아쉽지만

눈으로 따라 잇고 세석산장으로 우회하여 내려가기로 하고 되돌아 내린다. 발끝에 부딪히는 잔돌(細石)들이

척박한 고원을 철쭉으로 일구는 '연진(蓮眞) 낭자'의 손끝으로 아려와, 돌이 되어 촛대봉에 굳어 버린 사랑을 향해

'호야(乎也)'는 이 아침에도 영신봉을 떠나질 못하는구나..

내 가는 길에 음양수 한잔 마시고 어느 산봉우리에 올라 어느 님을 그리워 하며 돌이 될 수 있을까..

등뒤로 넘실대는 노고단 서부능선 산그리메를 타고 산케 벗들의 웃음과 힘든 숨소리가 실려 온다..

지금쯤 반야봉에 올랐을까..   

 

 (서부능선들)

(08:30-09:30)세석산장 야외 테이블에서 아침밥을 끓인다. 다행히 전날 비박조들은 출발하고,

금일 산객들은 도착하기엔 이른 시간이라 비교적 한가롭다.

긴 휴식과 식사로 충분히 피로가 가신 컨디션을 회복하고 낙남길의 내리막을 위해 가벼운 출발을 기념한다.

넓은 평전을 온통 뒤덮은 들꽃들의 축복을 받으며 주능선을 이별하고 남쪽 거림방향의 샘터 내림길로 내려선다.

또 한동안 세석의 이 평온함이 그리워지겠지..

십 수년전 평화롭던 이 고원 평전에 참호를 파도록 지시했던 관리는 출세했을까..

다행히 질긴 민초들의 씨앗이 자라 많이 복원된 이 곳에 맑은 웃음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어느 겨울 날 눈 내린 이 평전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 다시 널 찾으리라.. 

 

 (세석을 출발하며)

거림방향 남쪽 내림길 왼켠에서 물병을 가득 채우고 따가운 햇살 아래 걸어 갈 먼 길을 준비한다.

산죽길이 가끔 보이기 시작하며 거림 내림길을 지나고 편안한 능선길을 올라 음양수(1,450) 큰 바위에 올라선다.(10:05) 슬픈 넋을 위로하려는가..음양수 효험으로 아들 하나 점지 받으려는가..

힘 없는 백성이 기댈 곳은 이렇게 깊고 높은 산중에 자릴 잡은 큰 바위 뿐이런가...

지리산 남서쪽 가장 넓고 깊은 대성골 어느 숲 속에도 한 몸 숨길 곳 없어 등성이로 등성이로 몰려 올라와

결국 젊은 목숨들을 스스로 마감해야 했던 그날의 음양수 물맛은 어떠했을까..

씻겨 내리는 구절양장을 따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그들의 이데올로기도 함께 씻겨 내려 갔을까..

남쪽 하늘 아래 고향을 보았을까..  

 

그들은 살기 위해서 지리산에 들어왔으나

지리산은 그들을 살려서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성부, “대성골에서 비트를 찾아내다” )

 

 (음양수 신단)

과연 해방 후 좌익의 이름으로 남쪽에 머물러야 했던 그들의 운명은, 애초부터 잘못 줄 그어진 38선의 그것과 함께

상존할 수 없는 슬픈 것이었을까..인간의 삶에 대한 자유와 이데올로기의 정의는 국가와 지역과 정권에 의하여

항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일까

(이태 남부군).. 과연 그들은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주류에서 단지 소외된 집단으로 어쩔 수 없는 잘못 된

자리매김을 시도한 것일까..

과연 종교를 통하지 않고는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배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보편적인 이상사회는

찾을 수 없는 것일까..'생명'이라는 고귀한 단어가 저 하늘금에 매달려 답을 구한다.

 

 

 (음양수-나아갈 낙남 첫구간)  

 

 (음양수-반야 노고단 방향)

음양수를 내려와 산죽길을 그리 힘들지 않게 오르내리니 오른쪽 큰 바위 능선길을 만나 잠시 오른쪽 사면을 돌고

노고단쪽 대간 능선을 바라보며 다리쉼을 한다. 1,390암봉을 왼쪽으로 돌아 내리니 대성골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10;28) 처절했던 50여년 전의 아픔은 짙은 녹음에 묻힌 채로 말이 없다. 피아의 구분없이 빨치산과 수색대간의 치열한 교전 속에서 그들이 바랬던 당위와 정의와 자유는 어느 하늘로 사라졌던가..

일제를 지나기 이전, 우리네 이 땅의 조상 대대로 이어 왔던 비민주 왕조사회에서도

'善'의 정의와 인간 생명의 고귀함은 지켜오질 않았던가..

이 땅에 찾아 온 근대화와 민주주의는 그렇게 치열한 '권리' 획득을 위한 죽기 살기로 시작되어,

아직도 구천을 맴도는 원귀로 남아 저 하늘을 떠도는구나..

날아 오르는 한마리 까마귀가 긴 울음을 남긴다..

이 산중에서 얻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평등은 또 무엇이냐'고..

 

................

이 골짜기 온통 불바다가 되던 날

박격포탄 기관총탄 하늘을 찢어

하얀 산에 불꽃 날름거리고 검은 연기

하늘을 덮어 불춤을 추던 날

이 골 저 골 저 등성이 천불을 맞아

하얀 산이 온통 피가 되고 숯덩이가 되었다

 

엉켜붙은 그 주검들 더미 위에

누깔과 상처를 쪼던 까마귀 서너 마리

숨어살던 비결쟁이도 열네살 소년도

거기 쓰러져서 역사(歷史)가 되었다

 

나는 바위를 떠다밀고 일어나 눈을 털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 헤치며 내려간다

그 죽음들은 지금 어디로들 헤매고 다닐까

그로부터 40여년 침묵이 쌓인 지금

이 골짜기 왜 이리 고요해 숨이 막힐까                    - 이성부 “대성골이 너무 고요하다”

 

 (낙남 동부능선)

대성골 갈림길을 지나 삼신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 잠시 마주하는 암릉 봉우리를 우회하고,

큰 바위로 이루어진 석문을 통과한다.(10;46) 

분명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돌쌓기는 아닐진대, 그 틈 사이로 인간이 길을 만들었으니, 이 석문은 자연의 작품인가,

인간의 작품인가..이렇게 이념이란 인간 언어구조의 작난에 불과한 부질 없는 말장난으로 치부될지도 모를 일이다..

5분여 오름길을 걸어 올라 1321봉을 넘어서고 이어지는 암봉들을 좌우로 번갈으며 우회길을 밟는다. 

산죽길을 길게 넘어서고 고도를 조금씩 낮춰가는 능선길이 1237봉 헬기장에서 잠시 멈춘다.(11:36)

생각보다 진행이 느리다.그리 굴곡 없는 능선을 2.2km/시간 수준으로 걷고 있으니

무거운 배낭과 함께 가슴도 무거운 모양이다.

 

 (산죽길)

헬기장에서 산죽길을 따라 10여분 내려오니 한벗샘 갈림길에 닿는다.(11:50)

아무래도 더운 날씨에 물이 모자랄 것 같다. 배낭을 벗어 놓고 왼쪽 거림으로 내려서는 길을 따라 2-3분 내려가니

작은 샘물을 발견한다. 비박을 한 흔적도 있다. 이곳이 자빠진골인가? 갓거리골인가..

표지목의 40m표기는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고 100m는 될 것 같다.

되돌아 올라 계속 이어지는 산죽길을 오르내리며 점점 키가 커지는 산죽에 조금씩 기가 눌린다.

조망을 느낄만한 봉우리 오른쪽을 돌아 내려 1278봉을 우회하니 멀리 삼신봉이 보이는 암봉에 올라

내,외 삼신봉과 함께 멋진 남쪽을 즐긴다.(12:30) 

 

 (삼신봉에서 바라본 천황봉)

 

(삼신봉에서 바라본 남쪽 백운산)  

 

마주하는 삼신봉 북사면에는 산불흔적의 고사목들이 어지러운 영혼들의 춤사위 처럼,

하늘을 향한 손짓으로 천년을 통곡한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올라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니 추모비를 지나고

암릉을 기어 올라 삼신봉 정상에 올라선다.(12:50-13:10)

긴 휴식을 취하며 제단으로 꾸며진 정상에서 지리 종주 능선 백두대간길을 살핀다.

지나온 낙남길과 나아갈 왼쪽 외삼신봉길이 부드럽다.

불일폭포를 거쳐 쌍계사로 향하는 내삼신봉 길엔 휴일을 맞은 등산객들이 꽤 많은 편이다.

동쪽 중산리 계곡과 거림골 만나는 저수지가 맑게 빛난다.

내일이면 산케들도 지리종주를 축하하며 중산리 어디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겠지..

지금쯤 저 멀리 지리 서부능선을 걸어 연하천을 넘었을까..무탈산행을 삼신께 빌어본다.

 

 (외삼신봉)

 

 (청학동 계곡)

삼신봉 남쪽 암릉을 쌍계사 방향으로 잠시 내려선 후 왼쪽 청학동 방향으로 잡목 숲 9부 능선을 따라 

10분 남짓 내려서니 청학동 갈림길에 다다른다.

외삼신봉 정맥길은 잡목과 베어진 큰 나무등걸로 가려진채로 출입금지 표시마저 없으니 미리 삼신봉에서

눈그림으로 외삼신봉 길을익혀 놓질 않았으면 제법 당황스럽겠다.

가려진 덩굴을 헤치고 능선길을 찾아 오르니 산죽과 잡목으로 가려지긴 했으나 등로가 그런대로 뚜렷하다.

다만 남쪽 사면으로 기울면서 점점 산죽키가 커지는 탓에 얼굴을 다칠까 염려스럽고 보안경에 흠집이 생기기 시작한다. 두어번의 오르내림길을 거치면서 그리 힘들지 않게 외삼신봉 암봉에 올라서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13:45)

지리산 주능선을 완전히 바라보는 마지막 기쁨을 만끽하며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죽길이 걱정스럽다.

 

 

학 한 마리를 불러 함께 노닐거나

굴 속 바위틈 햇살을 모아 책을 뒤적이거나

고향이 그리워지면 구름 타고 가거나

모두 옛 사람의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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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에서 삼십리 걸어 내려와서

외삼신봉 돌덩이에 나도 주저앉는다

문득 돌아보는 지리산 큰 몸뚱아리 너무 잘 보여

나도 학이나 구름타고 넘나드는 것 같다

사람이 가야할 길

책보다 먼저 내다보이는 곳이다

- 이성부, “외삼신봉” 

 

 (1,064봉 전망대)

(13:50)외삼신봉 급경사 내림길은 조금만 내려오면 절벽을 만나 두번의 로프 잡이를 거쳐야 한다.

첫 구간은 매우 가느다란 밧줄이 되어 위험해 보인다.

두번째 내림 구간은 그런대로 밧줄이 굵어서 안심이 되지만 바닥까지 로프가 닿질 않아 매우 조심스런 하강을 요한다. 초보자는꼭 경험이 많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하며 스틱은 미리 접어 넣어야 한다.

아무리 출입을 제한할지라도, 길을 잘못 들 수도 있는 국립공원 등로에 안전시설 하나 없으니..

하긴 등산객들이 매어 놓은 로프도 잘라버리는 국공단 한심이들이니..

이어지는 암봉구간들을 왼쪽사면으로 우회하고, 잠시 산죽길이 이어지는 능선을 오르내리며 조금씩 고도를 낮추어 간다. 산죽길을 내려서고 암봉을 우회하며 짧게 오르 내린 후 1175봉에 올라서니 왠일인지 산죽을 정리하여 꽤 넓은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14:30)

모처럼 편한 자리를 잡아 10분 남짓 휴식을 취하며 신발을 벗고 옷속의 산죽 까칠함을 털어낸다.   

 

 (묵계리 방향)

긴 휴식 후 급경사 내림길의 산죽밭을 아주 편하게 내려간다.

꽤 넓게 잘 정리된 산죽길에서 이렇게 힘들고 엄청난 작업을 해 준 국공단 직원들에게 잠시나마 고마워하며,

때로는 좋은 일도 하는구나 하고 나의 국공단에 대한 편협을 부끄러워 한다. 

암릉지대를 좌우로 번갈아 우회하고 잘 정리되어 이어지는 두어개의 산죽봉을 짧게 오르내리며 1064봉 바위 전망대에서 마지막 천왕봉 주능선을 배경으로 담아 본다.(15:00)

북쪽  중산리가 천길 낭떠러지 밑에 보인다.전망대를 내려와 암릉지대와 산죽길을 편하게 오르내리며 묵계재 직전

봉우리를 좌우로 돌아 두르며 잘 정리된 산죽길을 따라 내리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앞서 간 두 대원들이 거미줄을 남겨둘 리가 없는데..갑자기 확트인 급한 내림길에서 나침반을 꺼내 지도를 맞추어 보니 동쪽으로 향해야 할 능선길이 남쪽 묵계사 방향이다.

급경사 내림길 10여분 알바가 다리에 힘을 쏙빠지게 한다. 

 

 (물매화)

묵계사 내림길에서 능선 정상으로 복귀하여 잘 살피니 정리된 산죽길 옆으로 산죽터널 입구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럼 그렇지..혹시나 하는 국공단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을 거두고, 사찰로 인도하는 산죽정리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다시 이어지는 산죽터널의 급경사 내림길을 힘겹게 뚫고 내리며 넘어진 고목들의 검문도 수차례 받으며 고개를 숙인다. 묵계재(산재머리) 넓은 공터에서 앞서 간 대원들을 만나고, 이름하여 삼신봉 터널이 지난다는 발아래에서

청학동-중산리를 잇는 자동차 굉음을 느끼고, 청학동도 많이 소란스러워 지겠구나 생각든다.

길섶에 청초한 물매화 한 그루에 알바의 원망을 접으며, 부디 때묻지 않은 네 모습을 훗날 어느 양지 바른

가을 숲 속에서 긴 시간 마주 할 수 있기를...(15:50)

 

 (고운동재)

묵계재를 지나 산죽터널을 길게 오르는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오직 암울한 긴 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는  산죽길이 지도상의 991봉을 오르기까지 30여분 동안 숨 쉴틈도 주질 않는다. 

해방 후 이 남도의 깊은 숲 속에서 쫒고 쫒기는 혈투를 벌여야했던 수만의 영혼들도 이렇게 하늘을 향할 수 없는

미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잔인한 인간의 제도에 따라 놀음 아닌 생사를 건 전장을 누비고 다녀야 했던가..

지금은 말없이 이 정맥 길 끝 자락 금음산을 바라보며 누워계신 고향 땅의 당신들을 그리워하며,

행여 전설같이 맺힌 전란시대의 한을 읽을 수라도 있었으면 하고.. 아프고 성가신 이 길을 이어가고 싶을 뿐이다. (16:20)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죽 내리막길을 5분여만에 빠져 나오니 넓은 묘역을 지나면서 편안한 잡목 능선에서 여유를 찾는다. 뚜렷하지 않은 잡목능선길을 거쳐 작은 봉우리를 넘어 내려서고 고운동재 국립공원 경계 철조망을 벗어난다.(16:40)   

 

  (편한 비박을 외딴집 마당에서)

길마재까지의 계획은 2-3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이 곳에서 비박장소를 물색하기로 한다. 

지도상의 배바위 아래 찰랑샘을 찾으려고 상부댐 저수지까지 내려가 보았으나 헛걸음질 치고..

피곤한 몸으로 다시 고갯마루로 지쳐 올라와 발을 담그려고 공원 경계 철망 안으로 계곡을 기웃거리다가

외딴집 마당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하룻저녁 마당을 빌린다.

별빛아래 찌개를 벗삼아 마시는 이슬이가 세명의 산객들을 잠 재우질 않는구나..(10/3 24:00)

 

(10/4 06;00)침낭 속에서 눈을 뜨니 산 속의 새벽이 어슴푸레 밝아 온다. 아침 누룽지로 원기를 회복한다.

왠지 아침 기운이 습하게 느껴진다.

맑은 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리 습한 것은 분명  양수발전을 위해만든 상부댐의 폐해가 아닐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아니라도 이리도 아름다운 고운계곡을 막아 댐을 쌓고 전기를 생산하겠다는 발상이

불과 10여년전에 나왔다는 사실이 한심스럽다. 강원도 양양에서 보았듯이 자연생태의 변화는 각오해야 될 것이다.

성삼재 도로와 더불어 지리산 보존을 위한 국립공원 관리의 정책이 이 정도밖에 되질 않으니..

그냥 차라리 담장을 쳐 놓고 밀림을 만들든지..

개방된 등로 하나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편리를 아우르지 못하는 관광정책의 머리이니..   

              

"지리산아 미안하다.."(박경리)

 

 (천왕봉을 뒤돌아 보며)

(07:20) 백토재까지 이어갈 두번째 날의 산행을 출발하며 고운동재에서의 멋진 밤을 평생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던 비워진 외딴집에 감사하고 깨끗이 정리를 마친 후 남으로 이어지는 들머리에서 기념을 남긴다. 첫 오름길엔 산죽이 없어 다행이다. 첫 봉우리 오른쪽 사면으로 돌아 들면서 산죽길이 짧게 펼쳐진다.

어제 고운동재 내림길에 비해서는 매우 양호하다. 이어지는 902봉 오름길 삼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사면의 산죽길을

따라 우회를 하여 능선길에 올라서니 한결 수월하게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산죽길을 다행스레 여긴다.(07:50)  

 

잠시 끊어졌던 산죽 길을 다시 만나면서 북사면의 키 낮은 산죽군락이 잠시동안 예뻐 보인다.

잠시 된오름을 거쳐 875봉을 짧게 내려선 후 묘가 있는 공터를 지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마주하는 봉우리를 왼쪽 사면으로 돌아 내리는 급경사 산죽터널에서 앞서가던 대원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산죽길 통나무에 미끄러지면서 짚은 왼손에 잘라진 산죽 가시가 손톱밑을 파고드는 부상을 당한다.

급히 지혈을 하고 응급조치는 하였으나 가시지 않는 통증과 염증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지나온 낙남길)

잠시 산죽터널을 빠져 나와 다시 응급조치한 손에 테이핑을 하고 진통제를 복용케한다.

계속 이어지는 치열한 산죽터널을 헤쳐 나가며 선두를 교대하고 암봉을 돌아 798봉 예쁜 소나무 곁에 배낭을 내리고 잠시 조망을 즐기며 휴식을 취한다.(08:45)

왼쪽 주산 능선 아래 반천 마을이 한가롭고 오른쪽 하동호 저수지가 가까이 보인다.

이리도 아름다운 능선길에서 반천을 거쳐 발 아래 지산골을 넘나들던 수많은 영혼들은 어느 골에 묻힌채로 반백년을

넘기면서 강 건너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이어지는 산죽길을 내려와 반천쪽 지산골 능선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맥길을 따른다.산죽길의 급경사

오르막을 짧게 오르며 고도를 높혀가 790.4봉에서 지나온 북쪽 능선을 다시 조망해 본다.(09:23) 

 

 

 (서쪽 하동호)

조금씩 짧아지는 산죽길에 안도하면서 오르내리기를 10여분만에 긴 산죽지대를 벗어나는 듯 잡목 내림길을 거쳐

주산으로 향하는 갈림길 능선에 올라선다.

산청/하동을 남북으로 가르는 경계선인 동쪽 주산능선과 이별하고 옥종/청암을 구분짓는 하동 땅 서북 능선을

남으로 이어간다. 비교적 편안한 잡목지대를 오르내리며 소나무가 있는 봉우리들을 두어개 넘어서면서 급한

경사길을 내려와 길마재(궁항/상이)에 닿는다.(10:10)

배낭을 내리고 다친 손의 지혈을 풀어내고 다시 소독을 한다. 제발 통증이라도 가라 앉아야 할텐데..

질매재 열두 모랭이를 넘어 온 옥종면 주유소 작은 탱크 차량이 장재기 어느 마을에 기름을 후딱 배달하고

다시 돌아 넘는다.20분 남짓 휴식을 취하며 상처를 치료하고 분기봉 내림길 직전에 나무에 배낭이 걸리면서

앞으로 젖혀진 발목을 점검하니 크게 이상은 없어 다행이다.

 

 (동쪽 주산방향)

(10:30) 질마재 도로 건너 왼쪽 임도 입구 들머리에 올라서서 7-8분 올라가 산불감시초소 봉우리(555봉)에서

주산능선과 하동호 서쪽으로 이어지는 시루봉 칠성봉 능선을 조망한다.

저능선 넘어 섬진강을 건너면 작년 겨울에 닿았던 호남정맥의 망덕포구에 닿을텐데..

왼쪽 능선길로 접어들면서 편안한 오르내림을 거치며 고도를 낮춰가고,작은 봉우리를 넘어 오름길에서

고인돌 처럼 큰 바위를 지나 오랜만에 급한 된오름을 지쳐 오르니 산죽길에 묻힌 칠중대고지(565.2)를 넘어선다.

격전지의 느낌을 풍기는 칠중대야 이미 이 능선을 떠났겠지만, 승자도 패자도 즐겁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사상전이

되고만 동족의 비극 속에서 누굴 기념하고 누굴 탓하리요..

산죽길에 묻혀진 고지 삼각점 처럼 그 의미를찾기가 힘들구나.. (11:10)

 

 (양이터재)

산죽길을 잠시 거치는 오르내림을 이어가며, 바위들이 가끔 나타나는 능선길을 편히 걸어간다.

마주하는 작은 봉우리들을 두어개 넘어서니 내리막길에서 90도 왼쪽으로 내림길로 이어지며

양이터재(양이터/본촌) 비포장에 내려선다.(11:45)

부상을 입은 대원은 매우 힘든 표정으로 지쳐 있다.

일단 점심식사를 준비하면서 상태를 파악하고 중간에서 산행을 접기로 한다.

남은 누룽지와 먹거리를 끓여 제법 배불리 먹는다.

교통편을 고려하여 돌고지재까지 진행하기로 하였으나, 아무래도 더운 날씨에 음료수가 관건이다.

식수보충을 위해 양이터 쪽 농장 길을 내려가맑은 개울물을 발견하고 빈 병을 가득 채우니 한결 걱정을 들었다.  

 

 (옥종면 방향)

(12:40) 점심식사와 긴휴식으로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고 고통 속에서도 돌고지재 까지 진행하겠다는 동료를

고맙게 여기며 작은 언덕을 넘어서니 식수보충을 위해 내려갔던 양이터 농장으로 이어지는 원양이터재를 넘어선다.

짧은 오르막을 거쳐 첫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잠시 발길을 돌린 후 계속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대여섯

봉우리들을 지루하게 오르내린다.

마주하는 방화고지 능선의 왼쪽 정맥길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면서 마치 한북정맥길의 방화선을 걷는

느낌으로 잡목과 억새 숲길을 헤쳐 나간다. 마침내 665.8봉 방화고지(촛대봉,봉화고지) 갈림길에서 오른쪽

고지봉우리를 이별하고 왼쪽652봉으로 90도 꺾어 내리기 직전에 잠시 배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한다.(13:30)

 

 (북쪽 단성면 방향)

마주하는 652봉을 향하는 동쪽 내림길이 암릉 급경사를 이룬다.

다시 올라선 봉우리에서 오른쪽 남으로 향하는 암릉지대 내림길도 역시 만만치 않다. 

산불의 흔적이 역력한 낮은 봉우리들을 고도를 낮추며 차례로 거친다.

이어지는 억새 밭들이 가을을 짙게 풍기며 멀리 돌고지재를 넘나드는 59번 국도가 꾸불거리며 다가온다.

오름길 마지막 597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왼쪽 옥종면 회신리 마을들을 내려다 본다.(14:20)

점점 지리산을 벗어나며 이념으로 무장된 빨치산의 영혼들과 이별을 고하는 산중 내림길에서 더욱 더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잦은 휴식으로시선이 머무는 골골 마다 망령들의 분묘에서 푸른 불빛을 일으키는 모퉁이를 보게된다..

내 어린 시절의 서부경남은 그렇게 많은 귀신불이 춤추며 다녔다.

방앗간 어귀에도, 낙동강 둑가에도, 뒷동네 큰산 소먹이골에도, 홍의장군 성터에도..

간간이 들리는 어른들의 숨죽인 이야기 속에서 '보도연맹'이란 이름으로..

나는 고교시절이 끝나는 날까지 무슨 좌파 언론인 단체인줄 알았었다..

 

 (다음구간 천왕봉 방향)

마지막 봉우리를 내려서서 묘역을 지나는 소나무 숲길을 좌우로 번갈으며 편안히 내려서면서

잠시 청암면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에 잘못 내려서기도 한다.

다시 능선길을 찾아 올라 농로가 이어지는 농장 울타리 안쪽을 걸어 간다.

쑥부쟁이 화려한 농로 언덕에서 구간 마지막의 기념도 간직하고, 갈림길에서 조심스레 살피며 대나무 숲 속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간신히 찾아내어 내림길을 밟으니 돌고지재 59번 국도 옥종/횡천을 가르는 고갯마루다.

진주로 향하는 길목에 옥종면 위태리 마을들을 지난다.누렇게 익은 벼밭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린다..

 

아래 웃논에 물꼬는 철철한데

이 집 주인양반 어데로 갔소

뻐꾹새 울 때 간 사람

기러기 울어도 오지를 않네

(갈티지역 모심기 노래)

 

 (돌고지재 내림길)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자,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느냐?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자신있게 대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이태의 '남부군'에서)

 

 (진주성)

 귀경길에 들런 진주에는 요즘 개천 예술제가 한창이다..중학시절 꽤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10/10 道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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